2026. 01. 30. - 02. 04.
0. 네 번째 준비운동: 출발점 찾기
연극에는 고정된 출발점인 희곡이 있습니다. 하지만 무용은 감각에 기반한 느슨한 출발을 할 때가 많죠. 승록과 효원은 이 지점에서 '무용의 대본'이라는 낯선 가능성을 떠올립니다. 그것은 동작을 지시하는 매끈한 스코어가 아니라, 무대 위에서 무엇을 인지해야 하는지 알려주는 거친 안내서에 가깝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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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안내서로서의 대본이 있다면
26.01.30. 금
승록: 요즘 저는 문득, 무용에도 ‘대본’ 같은 것이 있다면 작업이 어떻게 변화될까? 를 생각해보게 돼요. 제가 떠올린 ‘대본’은 지금까지 경험해왔던 스코어와는 조금 다른 결에 가까운 것 같아요. 해야 할 것을 정확히 수행하는 것보다, 무엇을 인지하고 있어야 하는지가 더 중요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고요. 장면의 서사나 의도, 시간의 감각, 시선 이동에 따른 이미지의 변화 같은 것들을 공유하는 '안내서'로서의 대본 말이에요. 그런 대본이 있다면, 오히려 무용수에게 더 많은 선택권을 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요.
효원: 저도 안무노트에 숫자와 그림을 많이 그리면서 작업을 했었는데요. 정말로 기억하기(만을) 위한 장치여서 그림과 숫자였어요. 글 같은 경우는 연습 때마다 적어보긴 하는데 추상적이라 그런지 나중에 제가 적었는데도 무슨 말을 적은건지 알아보지 못하는 경험도 했어요.(웃음) 그런데 이번 프로젝트에서 무용 대본 만들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저는 솔로 작업에 스코어를 만들어서 작업을 하고 싶은데 솔로 할 때는 좀 게을려져서 자꾸 즉흥으로 마무리하게 되더라고요. 앞으로는 솔로 작업을 좀 더 체계적으로 해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있어요.
승록: 작업의 시작에서 연극의 대본과 같은 무용의 대본을 시도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최근 들어 점점 커지고 있어요. 다만 제가 떠올린 ‘대본’은 지금까지 경험해왔던 스코어와는 조금 다른 결에 가까운 것 같아요.
제가 익숙했던 스코어는 숫자나 그림, 공간 스케치처럼 현장에서 벌어질 일들을 붙잡아 두기 위한 장치였고, 좋았던 순간을 선별해 그 장면의 신선함을 다시 불러오려는 시도였던 것 같아요. 그러다 무용수로 참여하는 작업들을 경험하면서, 특히 즉흥이 리서치나 창작 과정에서 많이 활용되는 요즘의 흐름 안에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해야 할 것을 정확히 수행하는 것보다, 무엇을 인지하고 있어야 하는지가 더 중요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고요. 그래서 다음에 작업할때는 해야 할 것을 명시하는 스코어가 아니라, 공연이 진행되는 동안 계속 떠올리고 있어야 할 흐름(예를 들면 장면의 서사나 의도, 시간의 감각, 시선 이동에 따른 이미지의 변화 같은 것)을 공유하는 안내서로서의 대본이 있다면 어떨까 싶었어요. 그런 대본이 있다면, 오히려 무용수에게 더 많은 선택권을 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요. 결국 이 상상은 제게 작업이 완전히 개인의 것으로 두기보다는, 누군가와 만날 수밖에 없는 협업의 형태를 떠올리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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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기록이라는 매체, 몸이라는 매체
26.02.03. 화
효원: ‘기록 매체로서의 몸’에 관심을 두고 있다고 말씀을 드렸었는데요, 같은 상황에 있었어도 사람마다 다 다르게 기억되고 이야기 하는 것에 흥미를 느꼈던 거 같아요. 최초의 사건 이후에 각자 다른 시간을 보내면서 기억이 바뀌는 것이 재미있었던 거 같기도 하고요. 요즘은 영상과 녹음본 같은 기록 매체가 있지만 그런 매체들이 없었을 때에는 온전히 사람의 기억에 의존해야 할 때가 있었을 거 잖아요. 그래서 궁금했던 거 같습니다. 그래서 다른 매체와는 다르게 몸이 매체로서 기억을 전달하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찾아보고 싶었어요. 기억이 몸에 어떻게 남고 어떻게 타인에게 전이되는지, 그래서 저는 이전에 〈10분쇼〉에서 시도하였던 이야기 만들기와 함께 이 작업을 이어가 보려고 해요.
승록: 기록의 문제도 중요하게 느껴졌어요. 결과만 남기는 기록이 아니라, 선택이 일어났던 순간, 망설임이나 우회, 혹은 방향이 틀어졌던 지점들까지 어떻게 남길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 말이에요. 기록 매체로서의 몸에 대한 효원님의 관심도 저는 이 지점에서 이해되었어요. 몸은 동일한 사건을 겪더라도 각자의 시간과 조건에 따라 전혀 다르게 기억하고 반응하니까요. 기억이 몸 안에서 변형되고, 다시 타인에게 전달되는 과정 자체가 이미 하나의 작업일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그래서 저는 무엇을 기록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일이, 작업의 시작을 다시 설정하는 방법일 수 있다고 느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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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선택과 비선택, 그리고 선택의 순간
26.02.04. 수
승록: 제 작업에서는 특히 ‘선택’이 발생하는 순간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그 시선 자체에 관심이 많이 가 있는 것 같고요. 왜 이런 작업 환경이나 관심사에 다다르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저 스스로도 정리해보니 꽤 오래된 질문에서 시작된 것 같아요. 대학 시절부터 저는 내가 하고 있는 무용과 예술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에 대해 계속 의문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아요. 예술교육과 제도 안에서 순수예술을 이야기하면서도, 동시에 그 제도에 깊게 의존하고 있는 구조가 어딘가 불편하게 느껴졌고, ‘어쩔 수 없잖아’라는 말이 너무 쉽게 사용되는 장면들을 자주 마주했어요.
그 말 뒤에 가려진 선택의 가능성, 혹은 다른 선택을 하지 않기로 한 결정들에 대해 계속 생각하게 되었고,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결과보다 태도, 완성보다 지속 가능한 방식, 다시 말해 ‘자립’이라는 단어에 관심이 옮겨갔던 것 같아요. 자립이라는 게 거창한 선언이라기보다는, 내가 어떤 조건에서, 어떤 방식으로, 누구와 함께 작업을 이어갈 수 있는지에 대한 감각을 스스로 점검해보는 일에 더 가깝다고 느꼈고요.
그래서 공연을 하나의 완결된 결과물로만 두기보다는, 때로는 분해하고, 되짚고, 다시 조합해보는 과정 자체를 작업으로 다뤄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그 과정 안에서 중요한 것은 결국 신뢰라고 느껴요. 함께하는 사람들과 어떤 선택을 하고 있는지, 그 선택의 기준을 서로 공유하고 감내할 수 있는 상태 말이에요.
이번 프로젝트에서도 그런 선택의 순간들을 지나오게 될 것 같고, 그 과정이 어떤 형태로 남게 될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적어도 우리가 어떤 조건 안에서 무엇을 선택해왔는지를 조금 더 선명하게 바라볼 수 있다면, 그 자체로 다음 작업을 위한 토대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보고 있어요.
효원: 다른 선택을 하지 않기로 한 결정들이라는 말이 인상적이예요. 선택을 안하는 것도 선택이라는 말씀이시죠! 우리가 지금의 형태로 이야기를 나누는 것에도 많은 선택과 비선택이 있었다고 생각되어요. 무엇보다 이 대화에서 흥미로운 것은 속도인 것 같습니다. 화상 통화의 형식으로 했다면 그 마저도 대화의 속도와 같을테니, 승록님 말씀처럼 휘발되어 버릴 수도 있고, 그 엄청난 양을 어떻게 기록하고 다시 볼 수 있을지에 대해 어려움이 많았을 것 같아요. 각자의 시간 안에서 주고 받는 속도가 대화로 나눌 때보다 바로 대답해야 한다는 조바심이 나지 않는 거 같아요.
승록: 효원님이 짚어주신 ‘속도’라는 감각이 특히 인상적이었어요. 사유를 가능하게 하는 속도인 것 같아요. 제가 말한 ‘선택이 발생하는 순간’에 대해 조금 더 구체적으로 나눠보고 싶어요. 저는 무대 위에서 이루어지는 거의 모든 순간이 약속이라기보다는 사실은 선택의 연속이라는 감각을 자주 느낍니다. 이를테면 ‘공간을 감각하라’는 지시를 받았을 때, 실제로 일어나는 것은 안무자에게 선택되어질 수 있는 것을 각자의 몸이 지금까지 학습해온 방식 중 하나를 통해 전략적으로 선택하는 일이겠지요. 수행자가 어떤 목적과 조건 안에서 생존하기 위해 선택을 만들어내는 그 순간 자체, 그 동작에 이르기까지의 판단과 망설임, 우회가 어떻게 발생하는지를 바라보고 싶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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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자의 싹] 네 번째 편지를 닫으며
무용수가 무대 위에서 '생존'하기 위해 내리는 전략적 선택들. 그리고 그 선택의 순간을 기록하려는 시도들. 두 창작자의 대화는 이제 관습적인 '무용'의 정의를 넘어, 수행하는 몸의 이면으로 더 깊숙이 파고들고 있습니다.
준비운동은 멈추지 않고 계속됩니다. 다음 호에서는 이 '선택'과 '망설임'의 기록들이 실제 작업에서 어떤 형상으로 드러나게 될지, 이어지는 필담을 통해 전해드리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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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록 안무가이자 퍼포머. 예술로 사는 일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하며, 일상의 사소한 장면들을 몸으로 옮기는 일을 한다. 성실한 효원 님의 장점에 슬쩍 올라타 함께 글쓰기 대화를 이어나가며, 발견되는 공연과 일상 사이 소소한 변화에 즐거움을 느끼고 있다. 최근에는 ‘믿음’이라는 주제에 빠져 ‘본다는 것’의 의미를 찾아 기분 좋게 허우적대는 중이다. |
권효원
‘무용’의 범주 안에서 안무, 퍼포밍, 영상창작, 기획을 하며 지낸다. 경북 영주와 대구를 거쳐 4년째 서울에 살고 있다. 이것저것 호기심이 많은 만큼 겁도 많아 시간을 배로 쓴다. 요즘은 시간을 잘 보내는 일에 몰두하고 있다. 감자를 통해 차분하고 신중한 승록님과 대화를 나누며 많이 배우고 영향받고 있다. 홀로 또 함께 쌓아가는 시간이 반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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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하는 말들
감자의 필담을 읽으며 어떤 생각이 일어나셨나요?
코너 '함께 하는 말들'에서는 여러분의 소중한 답장을 기다립니다.
보내주시는 답장은 다음 호에 발췌되어 이 자리에 기록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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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승록과 효원의 대화는 또 다른 방식으로 쌓이고 있습니다. 마침표가 아닌 쉼표로 이어지는 이들의 문장을 계속해서 지켜봐 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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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자에게 필담을 나누어 주세요. 다음 호에 발췌될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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